[뉴스콤 장태민 기자]
트럼프의 자국 중심적인 관세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이 대규모 미국 투자를 결정했다.
트럼프는 '변칙복서형' 협상가 답게 큰틀을 설정해 놓은 뒤 상대방에게 여지를 열어 주면서 미국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전략을 쓰고 있다.
트럼프는 현대차의 미국 투자소식을 알리면서 자신의 관세정책에 잘 적응하는 사례로 홍보했다.
영악한 협상가 트럼프는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대표기업'을 관세정책의 성공 사례로 평가하면서 인허가 문제 등이 발생하면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는 코스프레도 빠뜨리지 않았다.
■ 한국 대표기업의 대규모 투자 얻어내는 트럼프
트럼프는 현지시간 24일 정의선 회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많은 국가에 상호관세 면제를 줄 수 있다"면서 "자동차 등 품목별 관세도 아주 빨리, 며칠 안에 발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호관세가 미국 관세를 다른 국가가 부과하는 세율과 동일하게 하겠다는 약속에는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부과한 것과 같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4월 2일을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지만, 협상이나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언제든 미국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의도에 따르는 많은 국가에 상호관세를 면제할 수 있다고 한 발언이 위험자산 선호를 자극해 주가를 올리고 국채가격에 타격을 입혔다.
25일 현재 국내 주식시장에서 현대차와 기아 주가는 나란히 상승했다.
현대차그룹이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달러, 역사상 단일 국가 대상 최대 규모로 투자하기로 한 가운데 주가는 일단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미국을 제조업 생산기지로 만들려는 트럼프의 야심과 생존을 위한 현대차의 선택이 한국 대표기업의 거대한 미국 투자로 이어지게 됐다.
■ 현대차 구체적으로 어디에 투자하나
현대차그룹의 이번 투자는 자동차 생산 관련 86억 달러, 부품·물류·철강 관련 61억 달러, 미래산업·에너지 63억 달러로 구분된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우리돈 31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투자를 하게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생산능력을 50만대까지 확대한다. 기존 앨라배마 및 조지아 공장의 설비 효율화를 추진한다.
또 현대제철은 루이지애나에 연간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해 미국 내 자동차강판 공급망의 자립성과 안전성을 높일 예정이다.
이 밖에도 자율주행, 로봇, AI, UAM 분야 협력과 63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진행할 예정이다.
현대차의 이같은 선택은 관세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유민기 상상인증권 연구원은 "작년 기준 한국을 포함한 기타 거점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물량 기준으로 현대차 66.3만대, 기아 47.6만대 분에 부과될 우려가 있었던 약1.5-1.8조(현지 생산량 조정에 따라 그 이하) 내외의 보편관세 리스크는 해소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 연구원은 "전 거점 기준 현대차는 2024-2033년까지 총 120.5조원, 기아는 2024-2028년까지 총 29.6조원 규모의 중장기 CAPEX 및 전략 투자계획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 기아는 오는 4월 CEO Investor Day 행사를 통해 중장기 계획을 새롭게 발표할 것으로 기대된다. 투자 측면에선 3,5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 진행중인 기아가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편 "보편 관세 부과시 동시에 타격을 입게되는 GM과 Ford의 '2024년 해외거점 생산 > 미국 내 수입대수'는 각각 117.6만대, 39.6만대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 미국 정책 저항엔 한계...주판알 굴려서 미국 적극 투자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투자 발표는 주요 글로벌 대기업들이 트럼프의 4월 2일 관세 데드라인을 앞두고 관세와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TSMC와 소프트뱅크 등도 당했던(?) 일이란 볼멘 소리도 들리는 등 이번 일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는 평가들도 보인다. 하지만 결국 관세에 따른 피해와 기업 이익을 계산해서 접근할 수 밖에 없다는 진단들도 보인다.
윤혁진 SK증권 연구원은 "25% 관세 부과시 현대차, 기아의 이익 감소폭은 최대 연 10조원"이라며 "관세비용으로 지출하는 것 보다 투자 확대로 비용을 줄이는 결정을 한 셈"이라고 풀이했다.
최근 호세 무뇨스 현대자동차 사장은 "현대가 관세를 헤쳐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화를 늘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미국에서 전기차를 가장 많이 판매하는 회사이며 테슬라와 직접 경쟁하고 있다. 이미 앨라배마와 조지아주에 2개의 주요 자동차 공장을 두고 있다. 현대는 이날 조지아에 3번째 자동차 공장을 오픈한다면서 트럼프와 미국인들을 기쁘게 했다.
현대차의 전략적 선택이 미국 소비자들의 호감을 얻어 판매 파워를 더욱 높일 수 있다면 좋은 전략이란 평가도 보인다.
윤혁진 연구원은 "미국의 한국 자동차에 대한 관세가 낮아질 것으로 기대돼 긍정적"이라며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 등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쪽에선 현대차가 현재 국적을 가리지 않고 첨단기업들과 협업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며, 세계 최강의 구매력을 가진 미국에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장문수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3월 중 GM 협업 발표가 구체화 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도요타, Waymo, 엔비디아, 삼성그룹 등 협업에 대한 내용이 가시적으로 소통될 시기가 왔다"면서 " 자율주행, 로보틱스 등 미래 성장 부문에 대한 협업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현대차, 대규모 미국 투자가 떠올린 또 다른 시선의 한국경제 자화상
현대차의 대규모 미국 투자를 보면서 국내의 기업하기 힘든 환경과 비교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최근엔 암참(주한미국상공회의소) 등에서 '한국은 CEO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미국 상공회의소가 무역대표부에 제출한 교역상대국 불공정 무역 관행 의견서의 한국 항목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근로기준법 위반, 세금 신고 오류 등으로 형사 기소, 출국 금지, 징역형 등을 자주 당해왔다고 적시됐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대한 관세정책을 펼 때 한국의 과도한 기업인 벌주기가 한미간 통상문제가 될 것이란 주장들도 나왔던 게 사실이다.
사실 경제계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비지니스맨 중심으로 캐비닛을 꾸린 반면 한국 정책가들은 너무 나이브하게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계엄 사태 후폭풍 등으로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박수영 국민의힘 기재위 간사는 "선진국에서라면 법인을 상대로 민사 소송으로 다뤄질 사항들이 한국에서는 CEO 개인에 대한 형사 처벌로 이어져 기업의 투자와 경제 활동을 위축시킨키고 있다"면서 "2023년 정부 발표에 따르면 414개 경제 관련 법률 중에서 형사 처벌 항목이 5,886개에 달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한국은 CEO가 처벌될 수 있는 규정도 많다. 다른 많은 선진국에서 배임이나 근로자 안전, 노동 관련 법규 위반에 대해서 CEO 처벌 조항이 없거나 경미한 것과 대비된다"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은 대표적인 악법이라고 했다.
근로자가 사망하는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 CEO나 안전 책임자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받게 된다. 또 주 52시간을 넘겨서 초과 근무를 시킨 사업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른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민사 소송을 통해서 해결한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현대차의 대규모 미국 투자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국내의 과도한 규제와 척박한 투자 환경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미국 정책가들을 보면 다른 나라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데, 한국은 어떻게 하면 점점 더 경영 난이도를 높여 기업인들에게 빅엿을 먹일까만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