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 경영진은 고객과 투자자, 그리고 임직원 여러분 여러분에게 먼저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고 사과했다.
그는 "많은 분들이 삼성의 위기를 얘기한다. 이 모든 책임은 사업을 이끌고 있는 우리(경영진)에게 있다"고 경영진이 앞장서서 무엇보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을 복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간 삼성전자는 HBM에서 SK하이닉스에 뒤쳐진 뒤 좀체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시스템 반도체에선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는 등 최근 몇 년간 경쟁자들에게 뒤떨어지는 모습을 나타냈다.
이후 기술의 삼성이 실패한 이유와 관련한 각종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에선 '삼성 자체의 실패'가 아닌 기업 경쟁력 강화를 훼방놓는 '외부요인에 의한 한국 대표 기업의 실패'를 거론하기도 했다.
■ 한 삼성전자 중간간부의 꽤 오래된 자조..."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회사가 무슨..."
필자의 지인 중 삼성전자 중간간부로 일하는 A씨도 그런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농담반·진담반으로 이 사회엔 삼성이 진정으로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노조 설립을 유도해 삼성을 '건전한' 기업으로 전환시킨 결과 삼성의 기민성은 떨어졌다고 했다. 또 국가가 주52시간을 도입해 삼성의 노동자들도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됐지만 대신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됐다고 푸념했다.
삼성전자라는 한국 최고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 직원은 최근 삼성전자의 실패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한국 사회의 '삼성 죽이기'도 큰 몫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전부터 내부, 외부적 요인들로 열심히 하고 싶었던 직원들의 의욕은 많이 꺾였다고 했다.
이 직원이 말하는 삼성 죽이기의 주요 '외부' 주체는 정치권이었다.
당시 이 직원은 이런 말을 했다.
"조금만 일하면 52시간 초과된다고 시스템에 뜹니다. 진심으로 이런 회사에서 기술 개발이 잘 될 것이라고 보시나요?"
그는 반도체, AI 등 첨단 분야에 각국 대표 선수들이 사활을 걸고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한가하게 52시간이나 따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유도리 없는' 정치인들이 만든 정책에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 각국의 사활 건 반도체 지원
글로벌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은 갈등 중이다.
특히 최근엔 중국이 저비용·고성능 AI 모델인 딥시크를 내놓자 미국 뿐만 아니라 각국이 초미의 관심을 나타내면서 긴장하기도 했다.
지금은 기술 경쟁에서 밀리는 순간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각국은 첨단분야를 최대한 지원하면서 근무의 편의성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도 경주한다.
대만이나 일본과 같은 반도체 강국들 역시 반도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각국은 반도체를 국가안보전략산업으로 선정하면서 자국 기업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세계 최고 AI 기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선 '압축적 노동'이 힘을 발휘했다. 특히 연구 개발자들의 경우 근무의 연속성을 통해 효율을 극대화하는 전략들을 썼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엘리트들이 쉼 없이 일하고 있다. 한국 정책가들도 반도체 업계의 치열한 승부, 그리고 반도체라는 산업의 쌀이 가진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대로라면 앞으로 국내 반도체의 생존까지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해 중국 창신반도체(CXMT)가 DDR5(더블데이터레잇5)까지 선보이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영역을 잠식 중이라는 우려가 나왔던 터였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제조2025를 비웃기도 했지만, 중국은 전폭적인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 국내 반도체 석학들 사이에선 "한국 반도체의 이익률이 둔화면서 투자의 악순환 고리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또 지금은 열심히 개발하려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노동단체나 사회단체 쪽에선 '주52시간 예외'가 줄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하면서 '비인간적인 노동'을 합리화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 52시간 '예외' 반대하는 논리
소위 노동을 존중한다는 사회단체들 사이에선 주52시간 '예외'가 많은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노동과 자본이란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갖혀서 지금의 52시간 논란을 본다.
예컨대 과거부터 자본가들은 장시간 노동, 강제 노동, 아동 노동 등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보면서 힘들게 '쟁취한' 52시간에 예외를 둬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에 지분을 갖고 있는 민주노총은 강경하다. 최근 민주당이 52시간 예외를 허용할 듯 말 듯하자 '민주당은 자본의 하수인이 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노총은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였다"면서 "주 40시간 노동(최대 52시간)이 근로기준법으로 명문화됐지만 한국은 여전히 2023년 OECD 회원국 평균 노동시간(1,752시간) 대비 122시간(1,874시간) 더 노동하는 장시간 노동하는 국가"라며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반도체 산업이라고 예외를 둬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압축' 노동을 반대했다.
민노총은 "경쟁력은 시간이 아니라 속도와 방향"이라며 "민주당이 자본의 무한 탐욕 보장을 위해 최소한의 근로조건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이는 스스로 반노동 친자본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민주당 내 엘리트 국회의원들을 배출하는 산실이기도 한 참여연대도 강도 높게 반대했다. 참여연대는 좀더 구체적인 수치를 들었다.
참여연대는 "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3년부터 2년간 R&D 인력에 대해 총 23만8752시간의 특별연장근로와 19만5552시간의 연장근로를 실시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단 한 건의 특별연장근로도 실시하지 않았다"면서 "이는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의 원인이 ‘주 52시간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장시간 노동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지 않는다. 이를 추진하는 것은 그동안 반도체 업계에서도 유독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요구해온 삼성전자를 위한 특혜일 뿐"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을 강조하면서도 특정 산업에서는 노동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라고 했다.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제를 살리는 데 이념이 무슨 소용인가. 진보 정책이든 보수 정책이든 유용한 처방이라면 총동원하자"고 말한 부분을 문제 삼은 뒤 "결국 재벌대기업 중심 경제정책과 반노동 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여당은 최근 이재명 대표의 소위 실용주의 행보를 두고 '정치적 이익을 위한 기만술'로 봤다.
참여연대는 민주당이 노동시간 ‘유연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노동계와 경제계를 두루 포섭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라고 비난했다.
■ 한가하지만 힘이 센 '노동 성리학'
반도체 업계의 글로벌 경쟁이 격화된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연구개발 시간 규제 따위를 겨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러 사회단체들이 반대하고 있으며, 거대 야당은 반도체 '주 52시간 예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등 민주당의 주요 주주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반대하자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52시간 예외' 반대에 대해 삼성전자 중간간부 A씨는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같은 주장이라고 했다.
"지금 뒤처지면 우리 다음 세대는 뭘 먹고 삽니까. 한국이 다음 세대를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첨단기술 분야에서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한가하게 지금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그는 한국이란 국가가 발전 방향성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리고 아직도 기업 뒷다리를 잡는 게 무조건 선(善)인 것처럼 구는 행태 역시 이 사회의 일부 세력이 가진 오만함이라고 했다.
52시간 예외를 반대하는 단체들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문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쇠태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주체들 역시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이 대기업 중간간부가 볼 때 한국엔 노동 '성리학'에 함몰된 자들이 너무 많았다.
■ 52시간 예외 거부...한국은 도태되기 위한 제도적 노력 중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에 추가 노동 12시간까지 허용한다.
한국사회에서 논란이 된 반도체법의 52시간 예외는 모든 노동에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하도 반대가 많다보니 연구개발 인력 중 상위 5% 내에서 이렇게 하자는 것이다.
즉 다수의 노동자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하지만 민주당에 지분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몇몇 시민·사회단체들은 마치 70년대, 80년대처럼 모든 노동자들에게 큰 피해가 가는 것처럼 상황을 오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예외가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도 아니다. 삼성의 중간간부 A씨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무서워 어지간히 간 큰 사람이라도 돈을 더 안 주고는 연장근로 못 시킵니다. 그리고 지금이 무슨 노동 착취의 시대입니까. 노동자는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됩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52시간 예외가 과로사나 워라밸 문제와 부딪힌다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 요인은 기업의 경쟁력 상실이다. 기업이 경쟁에 도태돼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면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이 과연 첨단기술의 메카 미국이나 이 미국을 빠른 속도로 뒤쫓아 온 중국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한국은 메모리, 파운드리 등 각종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중국·대만과 경쟁하는 데 힘이 부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과연 주52시간제를 착실히 지키면서도 한국이 앞서나갈 수 있을까.
솔직히 한국은 제도적으로 망가지기 위해 애쓰는 나라처럼 보인다.
■ 현실성 떨어진 '노동 성리학'
사실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성과다.
주52시간 예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효율적인 노동으로 성과를 내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언어도단이다.
많은 시간을 투여했을 때 '성과'를 낼 확률이 높아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일도 적게 하고 노력도 덜하는 데 양호한 성과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한국 R&D가 미국, 중국의 경쟁자들 보다 덜 일하고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경제학은 노동가치를 평가할 때 단순히 '시간'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노동 환경이 복잡해지고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자 일단의 '현대'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은 시간을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한 시간 등)'으로 분해해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노력을 적게 한 일반 노동자와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과거에' 많은 시간을 투입한 노동자의 노동가치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상식적인 내용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치과 의사와 이를 보조하는 간호조무사의 노동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
필자는 52시간 예외 문제를 두고 반도체 회사 내부 직원들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듣자 이 케케묵은 이론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전문지식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더 일해 달라'고 할 때 시간에 대한 보상 뿐만 아니라 성공했을 경우 훨씬 더 큰 보상을 한다. 노동자가 이를 더 원하는 경우도 많다.
전문지식을 갖춘 젊은 노동자가 큰 개발 건 하나 터트리고 40대부터 여행이나 다니면서 노는 삶을 꿈꿀 수도 있다. 벤처업계에 뛰어든 노동자나 기업가는 성공한다면 주4일제가 아니라 주3일제, 주2일제도 할 수 있다.
미국과 같은 우리의 기술 경쟁 국가는 노동 방식에 있어서 '넓은 선택지'를 인정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투철한 애국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 노동자들은 '애국심'으로 기술보국에 매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도저도 아니다.
사실 52시간 예외는 반도체 뿐만 아니라 다른 첨단 분야에 다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 우리의 경쟁국들이 그렇게 하는데, 한국만 폐쇄적인 노동 운용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우리의 패배는 뻔하다.
국가를 발전으로 이끄는 주체는 법조문이나 읖조리는 자들이 아니라 과학자, 기술자들이다. 그리고 뛰어난 인재들은 '젊은 시절' 미친 듯이 한번 일해 보길 원하는 경우도 많다.
그 노동의 결과물은 엄청난 부, 무제한의 휴가나 스톡옵션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성공은 우리의 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 1명의 뛰어난 천재가 수십만, 수백만을 먹여살릴 수도 있는 시대인 것이다.
천사의 얼굴을 한 '노동시간 규제'가 실제로는 국가경제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필자의 과도한 걱정일까.
정 워라밸이나 예외없는 주40시간 안정 노동을 원한다면 별다른 혁신이 필요없는 안정적인 성숙기업을 찾으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대신 치열한 경쟁이 필요한 섹터는 법이나 규제로 지나치게 옭아매선 안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개방경제 시스템에서 살아야 하는 한, 한 발로 달려서는 두 발로 뛰는 주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