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내열성과 경량화가 특징인 현대제철 알루미늄도금강판[뉴스콤 장태민 기자]
최근 현대차 그룹이 대규모 미국 투자를 발표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제철까지 미국 투자에 동원돼 씁쓸하다.
한국 기업들이 트럼프의 관세전쟁과 미국 우선주의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미국에 투자할 수 밖에 없지만, 한국인 입장에선 여러 생각이 교차할 수 밖에 없다.
국내 상당수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진 가운데 국내 고용보다 미국 고용을 더 챙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난한 동네(한국)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자 동네(미국)에 도움을 줘야 하는 현실이 뼈 아프다. 미국인 인당 국민소득의 절반도 안 되는 한국이 부자 나라를 도와야 하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제철 노동조합은 파업을 압박하고 회사측은 '수지타산이 안 맞아' 인천 철근공장 가동 중단을 발표했다.
■ 현대제철, 노사 갈등 속 미국 강제 진출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업체들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상당기간 실적 어려움을 겪어 왔다.
최근 현대제철은 급기야 최근 만50세(75년생) 이상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퇴직 대상자로 선정되면 퇴직금 외에 정년까지 잔여 연봉의 50%(최대 3년치)의 위로금을 별도로 받는다.
현대제철은 중국산 저가 철강 공세에다 트럼프발 '철강 관세'라는 이중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자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고 임원들이 급여 20%를 깎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희망퇴직도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노와 사는 여전히 큰 갈등을 겪고 있다.
전날 현대제철 노조는 당진제철소 파업을 발표하면서 임금을 더 올리라고 압박했다. 급기야 현대차 수준의 성과급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노와 사가 악다구니를 쓰는 사이 트럼프의 등장 등으로 세계경제는 한층 거칠게 변하고 있다.
일각에선 현대제철 노사 갈등이 장기화된 가운데 앞으로는 '노조가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 될 것이란 주장도 내놓고 있다.
특히 최근 현대차 그룹의 대규모 미국 투자 발표를 보면서 결국 상당수 기업들이 국내를 포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보인다.
현대제철은 중국산 저가공세, 노사갈등, 산업용 전기료 인상에 따른 원가 상승 등으로 경영이 상당히 어려웠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가난한 자의 것을 더 뺏는' 무시무시한 트럼프 행정부까지 등장해 버렸다.
외부에서 큰 위협요인이 발생하면 내부자들은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제철 노와 사는 상대를 향해 으르릉거리고 있다. 결국 국내 철강산업이 공동화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는 지경이다.
■ 현대제철 노조는 돈 더 달라...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 제철소 건립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시간 24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현대차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기로 했다면서 치켜세웠다.
트럼프는 현대차의 미국 투자소식을 알리면서 자신의 관세정책에 잘 적응하는 사례로 홍보했다.
트럼프는 정 회장의 '훌륭한 결정'을 알리면서 미국의 정책에 잘 협조하면 상호관세를 면제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달러, 역사상 단일 국가 대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다.
미국을 제조업 생산기지로 만들려는 트럼프의 야심과 생존을 위한 현대차의 선택이 한국 대표기업의 거대한 미국 투자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투자가 너무 '전면적이어서' 이러다 한국 업체들 다 미국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렸다.
현대차그룹의 투자는 자동차 생산 관련 86억 달러, 부품·물류·철강 관련 61억 달러, 미래산업·에너지 63억 달러로 구분된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우리돈 30조원이 넘는 거대한 투자 선물을 트럼프의 품에 안겼다.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생산능력을 50만대까지 확대한다. 기존 앨라배마 및 조지아 공장의 설비 효율화를 추진한다.
또 현대제철은 루이지애나에 연간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해 미국 내 자동차강판 공급망의 자립성과 안전성을 높일 예정이다.
이 밖에도 자율주행, 로봇, AI, UAM 분야 협력과 63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진행할 예정이다.
걱정이 지나친(?) 사람들은 이번 일을 국내 기업들의 대규모 한국 탈출 신호탄 아닌가 우려하기도 했다.
■ 위기의 기업들, 차라리 이를 바에야 '미국'을 제조기반으로?
현대차그룹이 4년간 미국에 총 210억 달러를 투자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정의선 회장의 '관세 위협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이지만 이러면 미국 고용은 좋아지고 한국 고용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현대차그룹 '덕분에' 미국 루이지에나 제철소와 조지아 전기차 공장에서는 1만개에 가까운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경제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있던 제조업의 좋은 일자리마저 '더 부자인' 미국에 갖다 받쳐야 하는 꼴이다.
필자는 미국에 생긴다는 일자리 1만개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원래 한국에 있어야 할 일자리인데...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 국내 기업인들은 규제에 몸살에 앓고 있다.
주52시간 규제, 산업재해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 등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젠 정치권이 노란봉투법을 밀어 붙이는 등 기업 경영을 더욱 위축시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스스로는 매우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는 경제학의 기본 전제도 인정하지 않은 채 세계 최고의 상속세 체계도 옹호한다.
필자가 예민한지 모르겠지만 대규모 현대차그룹의 미국 투자를 보면서 한국은 '산업공동화 정책'을 통해 자진(自盡)하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다른 나라들은 해외에 나가 있는 자국 기업들을 불러들이는 판에 한국의 정치권은 정반대의 정책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한경연 등의 설문조사를 보면 해외로 나간 한국 기업들의 대부분은 국내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일본 등이 자국 기업들을 다시 영내로 불러들이는 것과 반대로 한 번 떠난 한국 기업들은 거의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 그룹 생산역량의 대규모 '미국 도피'는 한국경제 기반에 대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 위기에 처한 제조강국 한국의 위상과 질 좋은 일자리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미국 투자와 현대제철의 파업·노사갈등 등을 보고 있으면 '제조업 강국'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
필자는 일단 현대차만 가는 게 아니라 제철소도 미국으로 간다는 게 심상치 않은 일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자동차는 고용유발효과가 엄청난 산업이다. 현대차가 생산기지의 상당부분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면 자동차 관련 부품업체들도 미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대차는 이미 해외 판매용 생산물량이 내수용을 훌쩍 뛰어넘는 글로벌 기업이다. 미국 내에서 170만대 가량이 팔리지만, 이제 미국에서 120만대를 생산하겠다고 한다.
현대차그룹 내 자동차 뿐만 아니라 제철도 미국에 공장을 짓고 상당수 자동차 부품업체들도 따라가야 한다. 구경제 산업 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 내 로봇 등 첨단 산업도 미국을 베이스 캠프로 삼으려는 것 아닌가 싶다.
현대차 그룹이 일괄생산체제를 미국에 구축하면서 제조업 생산기지 한국의 위상이 더욱 낮아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일이 현대차 그룹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국내에선 정치권이 각종 기업 규제 강화를 친기업 정책이라고 우기고 있다. 또 노사 갈등도 극심해 기업인들의 한국 탈출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이미 상당 분야가 중국에 밀리면서 중상을 입은 한국의 제조업과 관련 고용이 트럼프 관세전쟁 등으로 인해 수습하기 힘든 2차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과연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 한국의 위상은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