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콤 김경목 기자] 일본은행(BOJ)이 초저금리 시대를 넘어 본격적인 정책 정상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임금 상승을 동반한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기본 시나리오가 실현될 경우,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25일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심의위원회 강연에서 “현재 실질금리는 극히 낮은 수준에 있다”며 “전망 보고서에 제시된 중심 시나리오가 실현된다면 경제·물가 상황 개선에 맞춰 정책금리를 계속 인상하며 금융완화의 정도를 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일본은행이 금리 인상을 단발성 조정이 아닌 중장기 정책 경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BOJ는 지난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현행 0.5%에서 0.75%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기준 금리가 0.75%로 올라선 건 1995년 이래 30년만의 일이다. 우에다 총재는 추가 금리 인상을 해도 “실질 금리는 매우 낮다”며 “경제, 금융환경, 물가 반응을 잘 지켜보고 (추가 금리 인상을)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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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 금리 인상…‘비정상’에서 ‘정상’으로
일본은행은 지난해 3월, 2% 물가안정 목표가 지속적으로 달성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판단하며 10년 넘게 이어진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종료했다. 이후 정책 프레임은 단기금리 조절 중심으로 전환됐고, 금리는 2024년 7월 0.25%, 2025년 1월 0.5%, 2025년 12월 0.75%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인상됐다.
우에다 총재는 이번 인상의 배경으로 ▲미국 경제와 관세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 완화 ▲일본 기업 수익의 견조함 ▲내년 춘투를 앞둔 임금 인상 기대를 꼽았다.
특히 그는 “미국 경제의 하방 리스크는 이전보다 낮아졌고, 관세 부담이 일본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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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정책 핵심 전제는 ‘임금 상승’
이번 연설에서 가장 강조된 요소는 임금이다. BOJ는 단순한 비용 상승에 따른 일시적 물가 상승이 아니라 임금 상승 → 소비 확대 → 가격 전가 → 기업 수익 개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정책 정상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우에다 총재는 “노동시장은 구조적인 인력 부족으로 타이트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며 “관세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기업 수익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2026년에도 올해에 이어 ‘확실한 임금 인상’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고, 기업의 적극적인 임금 설정 행태가 중단될 위험은 낮다는 평가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일본의 춘투 임금 인상률은 5% 안팎으로 상승했고,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일본은행은 이를 임금 기대 형성 메커니즘의 변화로 해석한다. 과거처럼 ‘지난해 물가 상승분을 보전하는 임금 인상’이 아니라 향후 2% 물가 상승을 전제로 한 선제적 임금 결정으로 전환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춘투(春闘, 슌토)는 매년 봄 일본의 노동조합들이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해 기업 측과 벌이는 단체 교섭을 의미한다. 2024년 춘투에서는 평균 임금 인상률 5.10%를 기록하며 33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인상을 달성했다. 2025년 춘투에서도 평균 임금 인상률은 5.25%를 기록하며 1991년 이후 34년 만에 최고 수준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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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물가로 돌아갈 가능성 낮아”...금리인상 ‘긴축’ 아닌 '성장' 기반 조성
물가에 대한 평가 역시 이전과는 결이 다르다. 일본은행은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신선식품 제외)이 3% 내외를 기록하는 데 대해 “일부 식료품 가격 상승이라는 일시적 요인이 크다”고 전제하면서도 서비스와 재화 전반에서 완만한 가격 상승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19일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일본 11월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보다 3.0% 상승했다. 시장 예상인 +3.0%에 부합한 가운데 10월(+3.0%) 수치에서 변동이 없었다. 전월비로는 0.3% 상승했다. 종합 CPI는 전년비로 2.9% 상승해 10월(+3.0%) 수치보다 0.1%p 하락했다. 전월비로는 0.4% 상승했다. 신선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근원 CPI는 전년비 3.0% 상승해 10월(+3.1%) 수치보다 상승폭을 0.1%p 좁혔다. 전월비로는 0.2% 상승했다.
우에다 총재는 “임금과 원가 상승을 가격에 전가하는 움직임이 정착되고 있다”며 “임금과 물가가 거의 움직이지 않던 ‘제로 노름(zero norm)’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 재발 위험을 과거보다 현저히 낮게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 춘투와 관련해 '제로 노름'은 임금 인상률의 하한선을 '0'으로 두지 않고,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의 베이스업(기본급 인상)을 확보하려는 노동조합의 전략 또는 임금 동결(인상률 0%)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될 수 있다.
다만 올해 일본 춘투의 맥락에서 더 직접적으로 쓰인 용어는 '베아 제로(ベアゼロ, 베이스업 제로)' 탈피였다. '베아 제로' 탈피는 일본 기업들이 장기 불황 동안 유지해 온 '정기 승급만 실시하고 기본급은 올리지 않는(베이스업 0)' 관행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춘투에서 노동조합은 '물가 상승분을 상회하는 임금 인상'을 목표로 하며 어떤 기업이라도 기본급 인상(베이스업)이 없는 합의는 하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교섭에 임한 바 있다.
BOJ는 금리 인상을 경기 제약 요인이 아닌 장기 성장의 토대로 설명한다. 우에다 총재는 “완화의 정도를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물가안정 목표를 원활히 달성하는 동시에 기업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BOJ는 기업에 대해 ▲임금 인상과 인재 투자 ▲AI 활용과 노동 대체형 설비투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실질임금 상승을 주문했다. 완만한 물가 상승 환경에서는 현금 보유보다 선제적 투자가 합리적 선택이 되며, 이것이 다시 임금과 소비를 자극하는 구조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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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해석 “조건부이지만 방향은 분명”
금융시장은 이번 연설을 일본은행의 정책 신호가 한층 명확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리 인상 경로는 데이터에 의존하지만, 방향성 자체는 ‘추가 인상’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점이 분명해졌다는 평가다.
시장 관계자들은 “일본은행이 사실상 ‘임금과 물가가 예상대로 간다면 금리는 더 오른다’는 조건부 가이던스를 제시한 셈”이라며 “장기 국채 금리와 엔화 환율에도 점진적인 구조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장기간 이어진 초완화 정책의 출구를 넘어, 이제 BOJ는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을 축으로 한 새로운 통화정책 균형점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그 여정의 관건은 전망이 현실로 이어질 수 있느냐 그리고 기업과 가계가 그 변화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경목 기자 kkm3416@newsko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