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콤 장태민 기자] 지난 주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이 '한국전력을 위한 변명'이란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눈길을 끌었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올린다고 공언해 놓은 데다 이 글을 쓴 국회의원이 한국전력 노조위원장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의원은 "지금은 적자를 보고 있는 한전을 탓할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공공요금을 묶어놓고 거기서 생긴 적자를 공기업의 탓으로 돌리면 누워서 침 뱉는 격"이라며 전 직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공기업에게 수익성을 요구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옳은 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한전, 그리고 공기업과 인연이 깊었던 국회의원의 이같은 '옳은 소리'는 허망한 메아리로 다가왔다.
정권이 바뀌기 전엔 아무 말도 없었고, 오직 나라 빚 늘리는 게 선(善)이라고 부르짖던 사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김주영은...
김 의원은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한국전력, 전국전력노조 위원장으로 일했다.
이 경력을 발판 삼아 2017년 초엔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돼 2020년 1월까지 일했다.
한국노총 위원장 재직 시절인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 공동선대위원장, 일자리위원회 위원 등을 거치면서 정치판으로 본격 뛰어들었다.
이후 2020년에 금뱃지를 달았으며 2021년 5월엔 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다.
노조위원장 출신인 만큼 국회 기재위 등에서 일할 때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를 많이 냈다. 국정감사 등에서 때론 강력한 어투로 상대방을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약자를 위하는 감성적인 캐릭터였다.
노조위원장 출신인 만큼(혹은 정규직만 대변하는 좋은 직장 노조위원장 출신임에도) "저임금, 비정규직 지원이 미흡하다.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고려해 최대한 더 추경을 지원해 달라"면서 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재정을 제대로, 듬뿍 쓰길 원했다.
■ '감성'으로 무장한 의원
김주영은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감성적인(!) 국회의원이었던 만큼 과감한 재정정책을 주문하기 일쑤였다.
그는 그간 "국가가 빚내서 지원을 해야 한다. 국가는 빚이 별로 없고 국민은 빚더미에 올라선 상황에서 국가가 나설 차례"라는 말을 반복했다.
재난지원금에 대해서도 "경제적 효과까지 극대화할 수 있는 재난지원금은 폭 넓게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일쑤였다.
작년 3월엔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세출구조조정이 어려워 9.9조원의 적자국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하자 "추경은 서민 대중의 지원을 위한 것"이라며 부총리에게 전향적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국가는 빚이 별로 없고 국민은 빚더미에 올라 있는데 같은 편(?) 경제부총리가 쩨쩨하게 굴어서 '서민의 편' 김주영 의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윤석열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가 된 추경호 의원은 당시 김 의원과 정반대 목소리를 냈다. 추 의원은 당시 불요불급한 기정예산을 구조조정할 여지가 많다면서 적자국채 발행을 당연시해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올해 들어 정권 교체기에 다시 한국전력이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자 김 의원이 친정을 위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인위적 경쟁체제를 도입하면 한전이 더욱 부실화된다"면서 공기업 경영 문제에 접근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한전이 놀랄만한 대규모 1분기 적자를 내고 한전에 대한 강도높은 자구 노력을 요구하는 주장이 높아지자 김 의원은 '변명'이라는 레토릭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섞었던 것이다.
■ 불가피한 공공요금 인상과 물가 우려
정부는 지난달 27일 오후 전기요금을 불가피하게 올린다고 발표했다. 연료비조정단가의 분기 조정 폭을 기존 3원/kWh에서 5원/kWh로 확대했다.
4인 가구 기준 월 전기료 부담이 약 1,535원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연료비 급등, 탈원전 정책 등으로 누적된 한전 적자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시가스 요금도 다음달부터 오른다.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 환율 급등 등으로 도시가스 요금도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도시가스 요금은 메가줄(MJ) 당 1.11원 인상됐다.
연중 가구당 월평균 2,220원 부담이 증가할 전망이다.
정부는 전기요금과 도시가스 요금과 같은 생활 필수재의 가격 상승이 국내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최소 한도로 조정한다고 했다.
추가적인 물가상승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공요금은 인상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공공요금이 인상되자 물가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는 모습이었다.
통상적인 시기 같으면 집권한 여당 사람들은 '금리인상 서둘지 마라'는 식의 목소리를 내지만, 지금은 물가가 급하다 보니 이들도 전통에서 탈피할 수 밖에 없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정부의 요금인상 발표 다음날인 28일 "7월부터 전기요금과 가스요금도 동시에 인상되면서 6% 물가상승률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한은은 7월 기준금리 0.5% 인상을 검토하고 있으며, 8월, 10월, 11월까지도 추가적으로 금리 인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그는 "더욱 큰 문제는 가계 대출 잔액의 77.3%가 변동금리라는 점이다. 본격적인 금리 인상 시기에 수많은 가계가 금리 인상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위기에 놓여있다"고 했다.
다만 경기와 오르는 금리에 대한 걱정 모두 인플레이션 예봉을 꺾지 못하는 이상 해결하기 어렵다.
■ 감성과 정치가 망가뜨린 한전
정승일 한전 사장은 28일 지금은 여당이 된 국민의힘 의원 총회에 불려갔다.
이 자리에서 한전 사장은 전기요금을 올려야 하는 데 올릴 수 없었던 억울한 사연을 토로했다.
정 사장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전기요금 인상을 열 번 요청했지만 단 한 번만 승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10번이나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전 정부가 올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기업은 그 특성상 회사 이익만 추구할 수 없지만, 힘 센 정부가 기업 재무상태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요금 동결을 강요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 사장은 "전기요금 인상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한전 적자가 30조원 가까이 이르렀다"고 억울해 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전기요금 인상요인이 없다고 했던 게 사실이다.
아무튼 한전 경영진의 절박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한전은 지난해 5.9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지금은 작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졌다.
러-우 전쟁 등으로 전기를 만드는 재료값이 뛰면서 상황이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원가를 녹이지 못하는 기업이 위험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상식이다.
아울러 아무리 공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수익과 비용, 그리고 재무상태를 무시하고 '공적 가치'에만 몰두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1.6조원의 큰 돈이 드는 한전 공대 설립을 강행해 안 그래도 축 내려앉은 한전의 어깨에 또 다른 짐을 지웠다.
대내외 여건이 악화되면서 한전은 올해 1분기에만 7조 7,869억원이라는, 그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규모의 역대 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아울러 이번 전기요금 인상으로도 한전의 적자를 누그러뜨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며, 올해 적자를 많으면 30조원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이번 연료비 조정단가 발표가 향후 이익 전망치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며 "2022년 영업적자 컨센서스가 23.1조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연료비 조정 단가 인상 효과가 미미해보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 한전이 흐린 신용채 시장 생태계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은 돈이 많이 필요했다.
한전은 올해 상반기 14조원 가량의 대규모 채권을 발행했다. 매달 2조원 넘는 채권을 발행했으며, 순발행 규모가 10조원에 육박했다. 한전의 발행잔액은 40조원을 훌쩍 넘어 MBS를 제외한 공사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가까운 수준으로 높아졌다.
지난 달 14일엔 8억달러, 즉 우리 돈 1조원 정도를 해외에서 꾸기도 했다. 에너지 결제대금을 위해 달러가 필요하지만 이번 발행을 통해 외화채 발행잔액도 30억달러를 넘었다.
올해 상반기엔 한전이 쉼없이 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하자 크레딧 채권시장도 수급 부담을 크게 느꼈다.
발행 물량이 늘어나자 한전채 3년 만기 기준 크레딧 스프레드가 60bp를 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다른 회사들은 금리를 더 높여서 수요자들에게 어필해야 했다.
한전 발행금리가 4%를 훌쩍 넘어서면서 투자자들은 '애매한' 신용 채권을 사는 것보다 재무구조는 나쁘지만 돈 떼일 염려 없는 한전채를 사는 게 나았다.
한전의 재무 상황이 악화됐지만 어차피 정부가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반기가 끝날 무렵엔 이 AAA 공사채가 4.3% 넘는 금리로 발행이 됐다. 다른 발행물들은 입맛만 다셔야 했다. 투자자들 입장에선 한전같이 신용도 좋은 채권이 싸게 나올 때 사놓는 게 안전한 접근법이었다.
물론 한전 덕분에 사기업, 공기업들은 더 높아진 조달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자산운용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이렇게 평가했다.
"상반기 한전채, 산금채 같은 것들이 상당히 높은 금리를 제시하면서 다른 채권들을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한전채가 회사채 우량물 등에게도 타격을 입혔고 결과적으로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시장의 물을 더욱 흐린 셈이지요."
■ '돈 달라' 외치던 사람의 '한전을 위한 변명'...미사(美辭)는 속임수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공기업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다.
공기업이 부실해지면 이는 곧 국민이 해결해야 한다. 결국 국민 세금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 살림과 공기업 살림의 유연한 연결고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공기업에 대해 국가재정의 '딴 주머니'로 이해한다.
국가 재정이 더 들어갈 일이 있으면, 공기업들을 윽박질러 요금 동결, 요금 인하와 같은 인기있는 정책을 펴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공기업은 부실해진다. 아울러 요금을 안 올리다가 한꺼번에 현실을 반영하면 물가를 자극한다.
2018년 여름도 꽤 더웠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냉방은 국민의 건강, 생명에 직결된 기본적인 복지"라면서 전기요금을 월 최대 2만원 깎아준다고 했다.
한전은 그해 상반기 원전 가동률을 낮춰 큰 적자를 보는 등 재정적으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국민을 많이 챙기는 정부 덕분에 한국의 대표적인 공기업은 더 골병이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일부 자립심 강한 사람들은 "월 전기료 많이 깎아줘봐야 몇 천원, 1만원 정도 수준인데 뭐하러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할 일을 벌이고 한전만 괴롭히느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다수는(?) 정부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감사했다.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이 치르는 것이다.
정치인이 국가가 무조건 돈을 더 써야 한다고 요구할 때, 국가에게 돈 달라고 손을 벌릴 때, 공기업도 같이 부실해진다. 한전이 이 모양이 된 데는 재정 포퓰리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김주영 의원의 '한전을 위한 변명'을 접했을 때 공기업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의 착한 마음씨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김 의원의 팬들은 주옥같은 글에 감동을 먹었지만, 필자는 국가재정을 더 퍼주지 못해서 안달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는 게 의심이 갔다. 솔직히 우리시대 정치인들의 공익을 가장한 이기심, 그리고 몰염치에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기득권에 찌든 노회한 정치인의 좋은 사람 코스프레, 즉 '속임수' 말장난에 속지 않는 능력은 음습한 시대를 사는 한국 국민들이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