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자 수요 측면을 그 원인으로 꼽는 시각이 강해졌다. 예컨대 중국 경기가 예상만큼 회복되지 못하는 데다 고금리 여파로 글로벌 수요 자체 자체가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진단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수요 쪽 요인에 무게를 두더라도 최근 유가 급락이 예상보다 과도해 '공급 카르텔' 세력의 힘이 예전만 못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는 시각도 등장했다.
다만 현재는 유가가 이미 급락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수준보다는 유가가 더 올라갈 것이란 전망이 많아 보인다. 유가가 70불선에서 60불대, 50불대로 내려가기 보다는 얼추 다 내려온 것 아니냐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이다.
■ 유가와 환율, '원자재 통화 속성' 갖게 된 달러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 입장에선 유가가 오르면 경기가 좋아진다. 이는 그 나라 통화의 강세 요인이다.
그런데 원유 순수출에서 최근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에서 지금은 세계 최대 수출국으로 위상을 바꿨다. 이 부분이 환율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미국 달러와 유가의 상관관계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된 것이다.
김선경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장기간 이어져온 미국 달러화와 유가의 마이너스 상관관계가 지금은 플러스로 변했다. 즉 유가 상승시 미국 달러화도 동반 강세를 보이는 흐름이 강화됐다"고 밝혔다.
원유 시장과 관련한 미국의 위상 변화가 달러에 상당부분 '원자재 통화' 속성을 부여한 것이다.
바클레이즈는 "유가가 10% 오를 때마다 달러인덱스가 0.6% 상승하고 실질실효환율이 1.5% 강세를 보인다"고 진단했다.
■ 유가와 환율, 유로화의 통화가치 산정 패러다임 변화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 입장에선 유가가 오르는 경상수지, 경제성장 등이 타격을 입는다. 이는 그나라 통화 가치 약세 가능성이 커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미국 외 다른 나라 통화는 사실상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인 달러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원유와 관련한 달러 위상이 변함에 따라 유로화 등이 움직이는 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김선경 연구원은 "과거에는 국제유가 상승 시 교역조건 악화 등에도 불구하고 유로/달러 환율은 미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는 과정에서 상승(유로화 강세)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를 전후로 약세 흐름이 강화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외 다른 나라 통화는 유가에 대해 달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2차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
코로나19 이전 과거엔 유가가 오르면 달러가 약세를 보였으며, 이는 달러인덱스 바스켓의 절반 이상 비중을 차지하는 유로화의 강세를 의미했다. 하지만 유가 상승이 달러가치 상승을 의미하는 구도에선 유가가 오르는 것은 유로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유로존 총수입 중 석유, 천연가스 비중은 각각 11%씩이었다. 고체연료도 1% 남짓이었다. 유로존의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꽤 크다.
지금은 유가가 오르면 미국 달러가 강해지고 이는 유로화 약세를 의미한다. 또 유가가 오르면 유로존 교역조건은 악화되고 이는 가계 구매력을 저하시켜 유로화 통화 가치 하락을 더 부추길 수 있게 됐다.
미국이 원유 순수출국이 됐다는 사실은 다른 원유 수입국들의 환율 버퍼를 축소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 유가와 환율, 아시아 통화들의 입지에도 변화
미국이 원유 순수입국이었던 과거에는 국제유가가 상승하더라도 미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여타 통화로 환산한 국제유가 상승폭은 제한했다.
하지만 미국이 원유 순수출국으로 위상을 바꾸고 코로나19 이후 에너지 공급 차질이 일어난 뒤엔 유로화 가치가 받는 마이너스 압력은 더 커졌다.
이같은 구도의 변화는 다른 나라 통화에게도 찾아왔다.
일본에게 유가 상승은 엔화 약세 압력 강화를 의미한다. 일본은행은 2016년 QQE 정책이 2% 물가목표 달성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롤 유가 하락을 들기도 했다.
다만 오랜기간 일본은 저물가를 상징하는 나라였으며, 엔화 자체가 지닌 안전자산 속성 때문에 유가가 올라도 엔화가 대폭 하락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에너지의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만약 유가 상승이 러-우 전쟁과 같은 공급충격에 의한 것이면 안전자산선호 고리를 작동시켜 엔화를 강세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공급 충격이 아닐 경우 유가 상승은 엔화 약세 압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러면 일본은행은 긴축에 보다 몰두해 엔화 강세에 더 욕심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중동 산유국 외 아시아 국가 다수는 원유를 수입해 소비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유가 상승시 통화가치 하락 압력을 받는다. 이는 물가를 올리고 경상수지 적자 가능을 키우며 성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이는 로컬 통화들의 달러 대비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JP모간은 유가가 20% 오르면 아시아 신흥국들의 소비자물가는 평균 0.6%P 상승하고 GDP는 0.2%P, 수역수지는 0.4%P 강소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아무튼 미국이 원유 순수출국으로 지위를 바꾸면서 달러와 유가는 같은 방향을 보려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런 흐름에 대해 다른 나라 통화들은 긴장도를 높여야 할 수 있다. 과거엔 달러가 유가 변동성 장세에서 여타국 통화에 대해 안전판 역할을 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유결제통화인 달러가 유가와 보조를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통화의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는 셈이다.
김선경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종전엔 국제유가 상승 시 미 달러화 약세로 인해 원유 수입 부담이 일부 상쇄됐지만, 현재는 이 매커니즘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서 "원유 순수출국 통화 역시 국제유가 상승 시 미 달러화 강세로 인해 자국통화의 대미 달러 강세폭 역시 제한돼 환율의 대외충격 흡수 기능이 약화됐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