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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1984의 언어

장태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5-13 13:36

(장태민 칼럼) 1984의 언어
[뉴스콤 장태민 기자] 어제 이재명의 대통령의 '긴축재정이 포퓰리즘'이라는 발언을 들으면서 소설 1984가 생각났다.

대통령이 마치 '뜨거운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재명 대통령은 진정 (언어 구사의) 천재인 것 같다"면서 "긴축에다 포퓰리즘 딱지를 붙여버리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조지 오웰의 위대한 소설 1984엔 무수히 많은 '언어 실험'이 등장한다.

오웰은 언어의 속임수에 현혹되는 순간 자유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바 있다.

■ 언어실험 소설 1984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나라 오세아니아의 통치자 '빅 브라더'는 인위적으로 개조한 언어인 신어(Newspeak)와 이중사고(Doublethink)를 통해 현실과 언어 사이의 극심한 혼선을 야기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한다.

신어는 오세아니아가 사람들의 '사고의 폭'을 좁히기 위해 개발한 언어다. 이중사고는 모순되는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참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 방식이다.

특히 오웰은 '이중 사고'를 활용하면 사람들의 논리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소설을 통해 입증한다.

오웰의 소설엔 '전쟁은 평화'(War is Peace), '자유는 예속'(Freedom is Slavery), '무지는 힘'(Ignorance is Strength)이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언어적 혼선을 극대화하면 대중들의 논리적 저항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언어를 지배하게 되면 사람들의 사상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오웰은 현실을 왜곡하는 단어를 강제함으로써 지배 권력에 저항할 정신적 도구인 언어를 빼앗아 버리면, 독재자들이 꿈꾸는 디스토피아를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 구조주의의 소설적 승화

오웰의 소설에서 선보인 언어 통제 방식은 199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크게 유행했던 구조주의의 핵심 명제와 연결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인간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언어의 구조 시스템(랑그, Langue)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한다고 봤다.

소설에서 당(黨)이 신어(Newspeak)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 구조주의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인간의 주체적 생각보다 '언어 구조'가 선행하므로 언어 구조에서 '자유'나 '저항'의 단어를 지워버리면 인간은 구조적으로 그 개념을 인지하거나 사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는 유동적이다.

단어의 의미는 고정된 게 아니라 체계 내의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다. 하지만 소설 1984에서 당은 이 구조적 대립을 없애고 '전쟁은 평화'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기호들의 관계망을 인위적으로 재구조화해 대중의 논리를 마비시키는 수법이다.

구조주의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회가 짜놓은 거대한 언어적 구조 속에 갇힌 종속적 존재일 뿐이라는 점을 웅변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소설 1984에 등장하는 피지배층과 하급 당원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말한다고 착각하면서 산다.

하지만 그들은 당이 재정의하거나 새로 만들거나 없앤 문자 체계와 구조 속에서 사고하면서 살 뿐이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의 정신과 사회를 지배한다는 구조주의의 거대 담론을 독재자들이 어떻게 무기화해서 사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 대통령의 구조주의 활용법

이재명 대통령이 사용한 '포퓰리즘적 긴축재정'은 표현 그 자체로 모순이다.

포퓰리즘의 정의는 복잡하지 않다.

국민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돈을 푸는 게 포퓰리즘이다.

긴축은 포퓰리즘과 반대 편에 서 있는 말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포퓰리즘을 좋아한다. 긴축은 인기 없는 정책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학 때 열심히 공부한 '구조주의 사회과학'을 활용해 이런 표현을 썼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보편적인 세계에선 선심성 돈 풀기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지, 건정재정에 대한 집착이나 긴축재정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올해 추경을 하기 전 예산 728조원, 적자국채만 110조원을 책정했다.

그리고 최근 IMF는 한국 부채비율 상승폭이 비기축통화국 가운데 세계 1위가 될 것이라 경고했다.

하지만 우리의 천재적인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은 포퓰리즘적인 긴축재정론에 빠져선 안 된다"면서 "과감한 재정투입이 경제에 활력을 넣는다는 게 일관되게 입증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치 돌림노래처럼 긴축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존재한다"고 직격했다.

그는 "(긴축 주장자들은) 국가 채무를 명분으로 들고 있지만 민생의 고통을 수수방관하라는 무책임한 목소리"라고 했다.

'이중사고'에 동참하는 사람들

소설 1984에선 당의 언어 말살 정책과 신어 편찬에 적극 찬성하는 사임(Syme)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사임은 당의 통제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언어를 없애면 사람들이 반역적인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임은 결국 제거된다. 빅 브라더는 사임처럼 체제의 본질을 명확히 꿰뚫어 볼 줄 아는 '전문가들'을 충성 여부와 상관없이 잠재적 위험분자로 판단해 없애 버린다.

대통령이 '긴축이 포퓰리즘'이라는 1984의 언어를 사용한 뒤 이를 정당화시키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도 13일 6.3 지방선거 관련 기자회견에서 "어제 대통령은 긴축재정이 포퓰리즘이라고 하셨다"면서 "기존의 틀을 깨면서 일을 잘 하고 계신다"고 극찬했다.

현재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상호 권력 투쟁을 벌이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해선 서로를 띄워 주는 때도 많다.

대통령이 생산한 이중사고(Doublethink)용 언어를 또 다른 권력자가 정당화하면, 그 사회의 언어 체계는 혼선에 빠질 수 있다.

권력자들이 힘을 합쳐 언어를 혼란에 빠뜨리면, 향후 '확장재정은 선이고 긴축재정은 악이다'라는 테제를 완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이 '먼저' 자신이 뽑은 권력자들의 '언어'를 일상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당신이 지지하는 권력자일수록 그 사람의 언어가 오염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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